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매일매일 기록하다’는 뜻의 라틴어 ‘쥬르나(jiurna)’에서 파생된 저널리즘(journalism)은 뉴스 등을 취재하고 편집하여 신문, 잡지, 방송을 통해 보도하고 논평하는 활동이나 그러한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 분야를 일컫는 말이다.
기자의 하루일과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밤새 도착한 뉴스속보와 독자들의 메일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근 인터넷을 통한 독자들의 의견개진 횟수도 부쩍 늘었고 요구 수준도 무척 높아졌다. 물론 여전히 한풀이성 제보가 많지만 언론 본연의 분석과 비평을 요구하는 독자들도 있다. 또, 본업과는 무관하게 특정사실이나 기사에 대한 논평과 자신의 주장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교민 J씨는 “현상황에서 분석과 비평이라는 저널리즘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여기지만 지적할 것은 지적해야 한다”면서 “한인장학재단 장학금 지급행사에서 벌어진 ‘풍선팔기 행사’가 강매수준에 가까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고 흥분했다. 심지어 그는 ‘학생들을 볼모로 삼았다’고 여기고 있어 사실(fact)의 주관화가 극심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선의로 한 일도 이렇게 나쁘게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독자 L씨는 “11일 열린 캐나다 현충일 기념행사에서 한국을 대표한 누군가는 헌화 했어야 마땅했다”며 “이는 총영사관을 비롯한 관계기관의 무관심이 빚은 결과”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 경우는 주관적 해석의 타당성을 결과론에서 얻으려 하는 경우였다. 비판을 위한 비판 같지만 행사에 직접 참여했거나 텔레비전을 지켜본 교민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수교 40주년과 휴전 5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롤 맞이한 한국이 결과적으로 헌화순서가 빠진 것에 대해 관계기관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다는 추궁인 셈이다.
물론 언론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H씨는 “교민신문이 10여 개에 이르면서 광고유치를 위한 각 사의 공세는 끈질기다 못해 거의 압력수준에 가깝다”면서 “광고비용과 효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문의 경쟁은 베끼기나 오래 버티기가 아니라 기사의 깊이”라고 꼬집었다.
바야흐로 '정리와 각오'로 대변되는 세밑이 다가온다. 이런 저런 이유의 각종 행사가 잦아지게 되면 또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은 뻔한 이치지만 이 기회에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의 모습을 한번 되돌아 보자. 볼품없이 키만 큰 모습으로 타인의 눈에 잘못 비춰지고 있는 점은 없는지? 아울러 내일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진실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서있는 듯 스스로 자문해 보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용욱 기자 lee@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