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는 관객이 앉아있는 현실 세계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무대 뒤 백스테이지는 현실과 가상 그 사이 어딘가를 누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만 입은 그림자들의 세상이다.
‘브레이브 뉴 플레이 라이츠’(Brave New Play Rites, 이하 BNP)는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UBC 연극 페스티벌이다. UBC 연극영화과와 창작문예과가 참여하고 UBC가 후원하는 행사로 지난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진행됐다. 창작문예과 학생들은 극본을 쓰고 연출과 학생이 감독을 맡으며 제작과 학생이 공연제작을 하고 디자인과 학생이 무대를 꾸며 완성된 다수의 단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실습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각 분야의 스태프와 디자이너로 참여한다. 학생들이 순수하게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무대이니 만큼 그 경험은 더욱 크고 값지지만 과정은 고되다. 이 페스티벌 준비는 학생들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로 꼽히기도 한다.
성황리에 막을 내린 페스티벌은 15분 길이의 13작품으로 이뤄졌다. 13명의 작가와 13명의 감독, 그리고 수많은 무대, 조명, 의상, 사운드 디자이너들이 흘린 땀의 결실이다. 쇼를 진행시키는 러닝크루(Running Crew)와 배우들을 제외하고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페스티벌에 매달렸다. 참여한 사람들, 리허설할 작품, 큐는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눈물나게 적었다.
보통 하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수개월의 초반 제작 과정, 그리고 최소 2주에서 한달간의 리허설 기간이 필요하다. 배우와 감독들이 합을 맞추는 사이, 각종 디자인과 제작이 들어가게 된다. 이 모든것 이 합쳐져 실제 공연장에서 종합적으로 리허설을 하는 것이 바로 ‘테크 위켄드’(Tech Weekend)다. 보통 공연 시작하기 바로 전 주말에 이루어진다. 길고도 지루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BNP의 테크위켄드는 3월 26일과 27일이었다. 곧 이어 28일과 29일에 드레스리허설이 열렸다.
나는 드레서(Dresser)로 BNP에 참가했다. 드레서가 주로 하는 일은 의상을 현장에서 관리하는 것이다. 의상을 입는 것, 벗는 것부터 공연 도중의 퀵체인지(Quick Change, 백스테이지에서 빠른 시간 안에 의상을 바꿔 입는 것을 뜻한다), 찢어지거나 뜯어진 의상의 손질, 빨래까지 의상에 관한 모든 것이 드레서의 일이다.
13개의 쇼를 위한 의상은 수십벌에 달했다. 학생 페스티벌이다보니 예산이 적게 나와 많은 의상이 배우들의 개인 소지품이었다. 개인 물품이 들어갈 경우 더더욱 각별한 신경을 써서 의상을 관리해야만 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15분짜리 짧은 쇼라서 퀵체인지가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었다. 의상을 갈아입힐 30초를 위해 어둠속에서 의상을 손에 들고 서성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안도가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테크위켄드의 날이 됐다. 테크위켄드에는 의상을 쓰지 않음에도 의상팀은 언제나 드레싱룸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상 보관실에서 의상들을 끌어내 드레싱룸에 옮기고 의상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등의 일을 했다. 작품별로 출연하는 배우들과 통성명을 나눠야하고 의상의 주인도 실수없이 알아야 했다. 의상을 돌려줄 때 실수가 없도록 각종 노트가 쌓여간다.
리허설 도중 할 일이 없을 땐 다른 의상스태프들과 모여 공부를 하거나 간식을 먹고 수다를 떤다. 이런 상황은 BNP에서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보통은 백스테이지에 올라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약한 플래쉬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거나 할일 없이 앉아 리허설이 진행되는 것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계획대로라면 12시에 점심을 먹고 3시에는 휴식시간을, 그리고 7시에는 모든 것이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리허설은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백스테이지에서 파김치가 되어있을 스테이지 크루들을 걱정하며 의상팀은 밥을 먹었다. 스테이지 크루들의 점심시간은 미뤄지고 미뤄져 오후 3시에 단 30분의 시간만이 주어졌다. 이번만큼 내가 드레서라는 것이 행복한 때가 없었다.
드레스 리허설은 좀 더 빠르게 흘러갔다. 배우들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가 의상의 문제점을 파악해 돌아왔다. 겨드랑이 부분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고 헤어진 낡은 블라우스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의상 스태프들 중 바느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손바느질로 의상을 완벽히 수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임기응변으로 넘겨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보통은 겨드랑이가 관객에게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수선하다 보니 전에도 몇 번이나 찢어져서 수선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보통 입는 옷이라면 진작에 버려졌을 옷이지만 옷이 무대의상으로 변하면 모든것은 달라진다. 나보다 나이가 두배는 많을 그 블라우스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생명을 얻었다.
배남영 인턴기자 rhimy@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