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로 인해 '친환경'을 선도해온 유럽 시장에서 친환경 디자인 붐이 주춤해졌다. 대신 디자인의 기초로 돌아가 기능에 충실한 제품 개발이 재주목 받고 있다.
지난달 22일 개막해 6일간 열린 '2009
밀라노 가구·조명박람회(I Saloni 2009)'는 이 같은 인식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줬다. 밀라노 가구박람회는 한 해의 디자인 흐름을 미리 볼 수 있는 세계 최대 디자인 전시회. 올 전시에는 전세계 2723개 업체가 참여했고 30만40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최근 몇 해 동안 이 박람회의 주요 화두는 친환경. 지난해는 아예 'Go green!(자연으로 향하라)'을 전시주제로 삼았고, 거의 모든 참여업체가 친환경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신용 위기 상황에서의 대처(an antidote to the credit crunch)'라는 무겁고 현실적인 주제로 급선회한 올 전시에선 지속가능성, 에코, 재활용 등을 내세운 친환경 제품이 현격히 줄었다.
- ▲ 올 밀라노 박람회에는 친환 경 제품보다는 군살을 빼고 기능에 충실한 제품들이 많 이 나왔다. 사진은 로낭& 에르완 부룰렉 형제가 기하 학적인 구조로 만든 의자./비트라 제공
전시를 둘러본 일룸 양영일 대표는 "지난해만 해도 전시관에 초록이 넘쳤고, 그린(green·친환경)을 외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지는 듯한 인상이었지만 올해는 확실히 이런 분위기가 한풀 꺾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박람회장에서 만난
삼성건설 김승민 상무는 "IT에 대한 투자 과열이 'IT 버블'을 가져온 것처럼 친환경에 대한 맹신이 '그린 버블(green bubble·친환경 거품)'을 초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친환경을 대신해 새롭게 대두된 키워드는 '유용성(utility)'.
영국의 스타 디자이너 톰 딕슨(Dixon)은 유용성을 전시 테마로 잡고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s)"고 강조했다. 그는 별다른 장식 없이 투박한 유리소재로 만든 조명, 심플한 나무 스툴 등으로 담백한 디자인을 강조했다. 카르텔, 모로소, 몰테니 등 주요 가구회사들도 장식을 배제하고 '기능성'에 초점을 둔 신제품을 선보였다. 뉴욕타임스는 '군더더기를 없앤 밀라노(Milan, Stripped Down)'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번 밀라노 박람회에서 주를 이룬 '기능주의'에 대해 다루기도 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많이 등장한 소재는 거울. 공간을 넓어 보이게 착시효과를 줘 공간활용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캄파냐 형제와 마시모 모로치(Morozzi) 등은 컬러 거울을 이용한 장식장과 서랍장 등을 선보였다. 장식에 들이는 비용을 줄이는 대신 과감한 컬러를 써 효과를 준 제품도 늘었다.
전문가들은 친환경이 시들해진 이유로 경기 침체로 인한 투자비용 축소와 친환경 제품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유명 디자이너 클라우디오 벨리니(Bellini)는 "친환경 제품 개발을 위해선 일반 제품보다 연구개발비가 더 많이 든다"며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연구비를 대폭 삭감하면서 친환경 흐름이 주춤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재활용 제품이 일반 제품보다 가격이 비싼 경우가 많다"며 "경제 위기 상황에서 '값비싼 친환경 디자인이 과연 유용한 디자인인가'라는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친환경이 보편화되면서 기업 입장에서 더 이상 차별화된 마케팅 수단이 아닌 것도 원인이다.
그러나 친환경 대세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영국 트렌드리서치회사 '웨스트식스'의 엘리나 카폴라 연구원은 "불황으로 인한 조정기일 뿐 경제 위기를 벗어나면 친환경 붐은 다시 탄력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렌드 키워드
지난달 22일부터 27일까지 열린 2009 밀라노 가구·조명박람회는 '불황에 대처하는 디자인의 자세'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경기 침체 속, 비용을 줄이기 위한 실용적인 디자인과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이 주를 이뤘다.
1. 거울 -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라!①거울처럼 반사되는 메탈을 이용해 페루치오 라비아니가 만든 조명. 카르텔 제품.
②브라질의 캄파냐 형제가 만든 거울 장식물. 착시효과로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한다.
2. 원색 - 장식 대신 컬러로 비용 절감
③카림 라시드가 만든 오렌지색 흔들의자. 슬라이드 제품.
④지친 심신을 달래주려는 의도로 폭신하고 따뜻한 털 소재를 쓴 소파. 에드라 제품.
⑤장식 대신 기존 모델에 컬러를 입힌 비트라 임스 암체어 2009년판.
3. 기하학 - 냉정을 찾아서
⑥ 마르코 자누소가 사각과 삼각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테이블.드리아드 제품.
/ 조선일보
밀라노=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